9월 13일
먼 듯 가까운 듯 목소리들이 들리고 펄럭펄럭 텐트 걷는 소리들이 들린다.
몇 시나 되었나? 시계를 보니 4시! 벌써 산행 시작 시간인가 보다
나는 한밤중에 바람과 전쟁을 하였더니 몸이 무거웁다.
‘3000미터 바람은 생각보다 쌔었네!’
누운 채로 텐트 문을 여니 부르지도 않았건만 바람이 훅 들어온다.
얼른 텐트 문을 잠그고 침낭 속으로 들어가 번데기가 된다.
번데기 안으로 행복이란 단어가 쑤욱 들어온다.
바람을 막아주는 이 작은 천막과 , 몸을 데펴 주는 따스한 침낭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다
그러한 행복감에 빠져 있자니 무거웠던 몸도 가벼워지는 듯 한 느낌이다
햇님이 내가 있는 이곳으로 오고 있는지 주위가 점차 밝으스레 해진다.
‘어자피 오늘은 이곳에서 쉬기로 하였으니 낮잠을 자면 되니까 슬슬 일어나 볼까?’
누운 채로 버너에 법랑 컵을 얹고 물을 붓고 불을 켜서 커피를 끓인다.
바글바글 끓는 소리에 불을 최소로 줄이고
오래된 로키 컵에 원두커피를 올려놓고 진하게 커피를 내린다.
‘음~~ 향 좋다!’
무게를 최대로 줄이기 위해서 일회용 카누 봉지도 모두 뜯어서 비닐팩에 한꺼번에 넣고
낱개 포장된 사탕봉지도 모두 찢어버리고 한 봉지에 넣어 올 정도로 짐을 줄였건만
이 일회용 원두커피에는 미련을 못 버려서 하루에 하나씩 먹자하고 20개 가져왔는데
역시 이러한 사치는 부릴 만 하다
커피한잔 진하게 행복도 진하게 마시고 재탕을 내려서 보온병에 따라 넣고 슬슬 마실 준비를 차린다.
이제는 본격적인 산행 시간인가 야영장은 산행을 준비하는 소리로 시끌시끌하다
아직 햇님은 나서지 않았지만, 햇님이 나서기 전에 미리 마중을 하겠다고 텐트 문을 열고 나온다.
밖에 나오니 동쪽 하늘에 오늘도 변함없이 후지산이 운평선 위에서 멋지게 서계신다
많은 사람들이 벌써 산행 길을 나섯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후지산과 일출을 보기위해 다들 텐트 밖에 나와 좋은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다
나도 빠질 세라 바람 안 부는 좋은 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다니다가
역시 사람들 많은 자리가 바람도 없고 좋아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앉는다.
드디어 “와” 소리와 함께 햇님이 행차 하시고
후지산도 햇님이 새로 마련해 준 옷으로 갈아 입는다.
멋진 아침이다!
바람이 새어서 춥지만은...........
서쪽 세상은 어떨려나?
서쪽세상이 궁금해서 사람들 틈새의 바람 없는 따스한 곳을 버리고 뒷 능선으로 오르니
서풍이 어찌나 세던지
기다다케를 넘는 구름들이 서풍에 찢어지고 있다
저 멀리 중앙알프스 너머 서쪽 하늘 은 구름이 도열하고 서있는데, 마치 전쟁터의 병사들 같다
오늘 오후부터 비가 온다더니 저 구름들이 몰려올 기세이다.
바람이 너무 나를 미는 통에 서있을 수가 없어서 산장으로 내려가려는데
등 뒤가 갑자기 환해져서 돌아 보니, 아이노다케 쪽 하늘에 오로라가 핀다!!!
북극의 오로라가 아닌 남알프스의 오로라다!!
몇 장을 간신히 찍고는 바람을 피해 바위 뒤에 숨어서 구경을 하니 한 1분 이상 펼쳐졌던 오로라쑈가 점점 히미해진다
바람을 막아주는 바위 뒤에 숨은 김에 커피 한잔 마시고 있자니
서쪽하늘 저 끝에 있던 구름이 벌써 내가 있는 이 남알프스 능선 센조가다케까지 손길을 뻗쳤다
아니 그런데 이것은 또 무슨 광경일까
하느님의 아들이 또 탄생하는거 아녀?
나는 구름장에서 햇살이 퍼져 넓게 내려가는 것은 많이 보았었는데
구름장에서 내린 햇살이 한곳으로 모여지는 것은 처음 보았네
난생 처음 보는 광경들에 입술이 파래지는 것도 모르고 있네
이런 바람 속에 혹시나 텐트가 날아갔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어서
나가 있던 넋들을 챙겨서 다시 산장으로 내려간다.
야영장을 가득 메웠던 텐트들은 모두 없어지고 내 텐트와 두 세 동의 텐트만 썰렁하니 남아있다
그나마 한 텐트는 펙이 하나 빠졌는지 한귀퉁이가 들썩 들썩 거린다.
주인 없이 바람을 맞던 내 텐트는 마치 뾰류퉁이 삐친 듯 보인다
텐트에 들어가 침낭 안에 누우니 언 몸이 녹진녹진하다
‘오늘은 바람이 안부는 곳으로 이사를 해야지’
‘구름이 저리 몰려오고 있으니 조금만 더 쉬었다가 이삿짐을 싸야겠다’
ㅎㅎ 일 년에 한 두 번은 이렇게 자리를 잘 못 잡아서 이사를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삿짐을 쌀 때는 어자피 금방 푸를 짐이라서 힘들여 배낭을 꾸리지 않으니
꼭 보따리 몇 개를 배낭 안에 넣을 수가 없어서, 들고 가야 할 짐이 많아진다.
우선은 대충 짐을 싸 놓고, 바람 없는 자리를 물색하러 나가 본다
산장 주위를 돌아보니 우와 멋진 곳에 텐트사이드가 제법 많타
어제 노닥거리지 않고 일찍 왔다면 이 멋진 곳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다음번에 오게 되면은 이곳에 텐트를 쳐야 겠는걸 -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르지만 z-
밤새 바람한테 너무 혼이 난 탓에 바람이 적은 곳을 고르겠다는 욕심으로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텐트사이드를 고르고 있자니
멋진 곳은 바람이 있고, 바람이 없는 곳은 산장근처로 발전기 소리가 ‘윙윙’ 난다.
오후부터 비가 온다 하였으니
좀 시끄럽더라도 바람이 없고 비도 덜 맞을 것 같은 산장 뒤에 자리를 잡기로 하고
짐을 가져온다 역시 이삿짐은 세 번에 걸쳐서 가져온다! ㅋㅋ
이제 아침 급한 불은 껏는지 배가 심하게 고프다
산장에 가서 어제 주문한 벤또를 받아 온다 벤또는 이쁘게 포장이 되어있다
텐트로 가져 와서 포장지를 뜯어보니
썰어놓은 김밥과 유부초밥 그리고 계란말이와 락교가 비닐팩에 밀폐 포장되어 먹음직스럽게 보인다.
만원짜리 벤또라 그런지 맛은 있다
이것을 산장에서 만들었을까 궁금했는데 포장지에 스티커를 보니 냉동식품이다 보존기간이 내년까지 되어있네
그러면 이 산장의 냉동 창고는 얼마만할까? 정식식사에 들어가는 고등어 같은 생선도 모두 냉동식품들인가본데!
김밥을 먹고 있는데 후두둑 빗방울 뜯는 소리가 들린다.
‘ㅎㅎ 이제 태풍이 와도 상관없어! ’
큰 소리 치고 후식으로 커피 한잔 마시고 또 침낭 속으로 들어간다.
'큰소리는 쳤지만 그래도 태풍은 반갑지 않지 ㅋㅋ'
다행히도 비는 이슬비에 그치는지 사그락사그락 조용히 내린다.
사그락사그락 소리에 스르르 잠이 든다.
얼마나 잤는지 화장실 소식에 일어나 우산을 챙겨들고 화장실 행차 한번 하고 또 들어와 눕는다.
또 어느새 잠이 들었엇는지 잠에서 깨어보니 배가고프다
‘ㅎ 오랜만에 시원한 신라면이나 끓여 먹어 볼까? 비오는 날하고 라면은 궁합이 잘 맞지!’
산행 할 때는 점심도 없이 행동식으로 때웠는데 쉬고 있자니 오히려 더 배가 고프다.
물은 산장 앞 수도꼭지에서 퀄퀄 나오니 물이라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어서 좋다
3000미터 산꼭데기에서 이 무슨 물호강인지 모르겠다.
아직도 가야할 날이 열 며칠이나 남아있으니 식량을 낭비할 수 없어서 라면 반조각만 먹기로 한다
아쉬우니까 잡곡 누룽지 한주먹 넣어서
라면 한사발 뚝딱 해치우고 커피한잔 마시고 또 누웠다
오후가 되니 다행히 비는 그쳤다
‘비가 그쳤으니 실실 마실이나 나가볼 꺼나?’
텐트 문을 열고 나가 선 순간
‘아이쿠!’
순간의 방심으로 바람에 밀려 하필이면 큰 돌멩이 있는대로 넘어진다.
에구 누가 보지도 않는데 챙피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발딱 일어 섯으나 종아리 쪼인트 부분이 알알하다
아픔에 서있지 못하고 다시 앉아서 종아리를 부둥켜 잡고 통증을 가라앉혀 본다
그래도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고 가죽만 좀 찢어져서 피가 났다 굳었다
좀 쉬었더니 참고 걸을 수 있을 것 같아 기다다케 쪽으로 걸어본다
바람은 광활한 누런 풀밭을 스러 트리고
속모를 회색 구름들을 연신 싣고 와
거대한 바위봉우리를 삼켜버렸다
스러져 우는 누런 풀밭 사이로 두 개의 길이 기다다케쪽으로 누워간다
하나는 기다다케로 오르고 하나는 동쪽 사면으로 돌아서 기다다케 동쪽 능선과 만나는 길이다
갈림길에서 가보지 않은 길로 들어선다
바위 봉우리아래 누런 풀길은 마치 지리산 촛대봉 같다
왼쪽 머리위에는 큰 바위와 잔돌 너덜 사이사이로 회색구름이 울면서 가고
오른쪽 발아래에는 마치 세상 끝까지 누런 풀밭이 펼쳐져 있는 듯 광활한 풀밭이다
아마도 여름에는 야생화 천국 이었으리라
눈감으면 여름의 야생화들이 보이는 듯하다
지리산 촛대봉을 거닐 때처럼 콧노래가 절로 난다
손에 야생화 꺽어 들고 이리저리 흔들며 사쁜사쁜 날아다니는 산아가씨 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진다
‘울적한 마음달래려고 산길을 돌아섯더니 ~~ 나는 정말 반했다오 정말 멋있는 산아가씨~~
구두도 못 신고요 의복은 낡았어도 맑고 맑은 그 눈동자 정말 멋있는 산아가씨~~‘
가스가 노니는 풀밭이 너무 좋아 산길을 버리고 풀밭에 들어가 앉아서 노는데
가스 속에서 사람 소리가 난다 길을 잃은 등산객인가보다
나를 보더니 기뻐하며 산장 길을 묻는다 아래쪽 길을 가리켰더니 고맙다고 하며 내려간다
나도 야생화처럼 이곳에서 발붙이고 눌러 살고 싶다
가만히 두면 이대로 눌러 살 것 같아 가이코마가다케의 모습을 보러 가자고 졸라서 몸을 일으킨다
아슬아슬한 바위 길엔 위태위태한 나무사다리가 놓여있다
죽기는 싫은지 바위쪽으로 몸을 바짝 붙이고 조심 조심 발을 내딪는다
드디어 삼거리!
기다다케 동쪽 능선과 계곡길이 만나서 기다다케로 오르는 삼거리이다
마치 마니산 능선처럼 바위들이 멋들어지게 서있다
삐죽삐죽 서있는 바위 중에 바람을 막아주는 바위를 찾아 그 뒤에 숨어서 커피한잔 마시며
가이코마가다케의 모습이 보이기를 기다려본다
어제 가타노고야 산장쪽에서 울긋불긋한 천상의 정원들에서 노느라
웅장한 가이코마가다케에 눈길을 못 준 것이 못내 아쉬워
가이코마가다케와 더 멀어지기 전에 조금 더 눈에 넣어 놓으려 했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가스는 옅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5시반에 저녁을 예약해 놓아서 하는 수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
위태로운 길을 지나 십여분을 가는데 가스가 옅어지며 기다다케의 웅장한 바위봉우리가 가스에 씻기며 나타난다
가이코마가다케 ! 남쪽 능선으로 가면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뛰다시피 삼거리로 오지만
무정한 가스는 금새 몰려 와 산을 뒤덮는다.
바람도 숨을 쉬는 시간이 있어 가스가 잠시 공백을 보이는 시간들이 있는데 너무 찰나였네.
십여분 기다리다가 저녁 먹으러 가기 위해 다시 일어선다
오늘 저녁도 역시 카레라이스!
오늘 밤은 바람소리대신에 발전기 소리 들으며 밤을 맞는다.
그래도 발전기 소리는 내 텐트를 뒤흔드는 일이 없으니 다행이다! ㅋ
9월 14일
새벽4시
집에서라면 깊은 잠속의 시간인데도 눈이 번쩍 떠진다.
한잔의 원두커피로 사치를 하고, 짐을 싸기 시작한다.
올 때 와 같이 하나도 줄지 않은 짐은 다시 배낭 속으로 다 들어간다.
5시! 오늘아침은 카레라이스 대신 정식아침을 주문해 놓았다. 가격이 200엔 차이라서
식판 위에는 밥과 계란말이한개 소세지2개 야채볶음 낫또 김 그리고 된장국
밥과 된장국, 야채볶음은 얼마든지 더 먹을 수 있게 탁자위에 놓여있다
‘산에서 갓 지은 쌀밥에 여러반찬들을 내 수고 없이 먹으니 무척 편하고 좋네 이 순간은 산이 아니고 식당에 있는 것 같터 ’
앞에 앉아 밥을 먹던 총각이 김을 남겼기에 나한테 달라고 해서 주머니에 넣는다
이곳 식당에는 스마트폰 속의 일기예보처럼 오늘 시간별 날씨와 일주일 날씨가 나와 있는 모니터가 있어서 날씨를 보니
오늘은 맑고 목,금요일에 비가 되어 있어 참고하고 나온다
불
배불리 먹고 나와 보니 벌써 햇님은 구름 위로 두둥실 떠올라 있다
아침 볕이 참으로 맑아서 마치 깨끗한 가을날 같다
‘바로 눈앞에 웅장한 봉우리가 보이지만 속으면 안돼, 저리 가까이에 아이노다케가 있을 리 없지’
봉우리를 오르고 능선을 너울너울 지나 또 봉우리를 지나서야 자그마한 돌무덤 위에 막대기하나 삐쭉 솟아 있다
그 막대개에 작은 냄비받침 같은 나무를 붙여 아이노다케를 세겨놓은 것이 정상푯말이다
아이노다케정상에서 본 기다다케
아이노다케정상에서 본 센조가다케
아이노다케 정상에서 본 시오미다케
아이노다케 정상에서 본 노토리다케
아이노다케!
기다다케는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 봉우리인데,
아이노다케는 잔돌들 잔뜩 깔아 놓은 너른 봉우리이다
360도 어디를 보아도 내 시야를 가리는 물건은 없다.
운동장 보다 너른 봉우리에서 능선은 네군데로 뻗는다
북쪽으로는 기다다케와 센조가다케 그리고 남쪽으로는 시오미다케와 노토리다케
너른 자갈밭에 앉아 이번 산행에는 가지 못하는 노트리다케를 바라보며 커피한잔 마시는데
바닥에 반작거리는 것이 있어 보니 에니타임 사탕껍질! 얼른 주어서 주머니에 넣는다.
이곳에서야 노토리다케의 참모습이 보인다
발아래 능선 안부에 노토리다케 산장이 보이고 그 뒤로 노토리다케가 웅장하게 또 하나의 산을 이루고 있다
길은 정상에서 노트리다케와 三峰岳(시오미다케쪽)으로 갈라선다
아이노다케에서 三鳳岳 가는 길
三峰岳 정상에서 본 기다다케와 센조가다케
노토리다케에서 눈을 거두어, 시오미다케 쪽으로 몸을 돌려 걷는다
아이노다케 어깨에 놓인 三峰岳 여기서 길은 남북으로 갈라져 시오미다케와 센조가다케로 흐른다.
등산객들은 모두 노토리다케 쪽으로 갔는지 이 길엔 나 혼자이다
간간히 들리던 사람소리도 전혀 없고 이제부터는 나의 세상인가 보다
三峰岳 바위에 앉아 센조가다케로 흐르는 길을 바라보고 쉬었다가 일어서서 다시 길을 걷는 데 계속 내리막길이다
아마도 산을 내려가는가 보다
계속 내려서니 왼쪽 옆에서 같이 나란히 누워가는 노토리다케능선이 계속 따라온다
앞쪽에서 본 모습과 또 다른 모습의 노토리다케이다.
노토리고야에서 아이노다케를 가로질러 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를 지나자 이제 산은 다른 풍경이다.
내 어깨 높이의 관목들이 길과 나란히 가더니 어느새 나무들이 쑥 자라서 울창한 산림을 이룬다.
빽빽한 산림 속으로 들어가니 고사목들도 나오고 그속에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도 들린다.
그런데 어디서 나타났을 까 마치 알프스의 소녀하이디의 일본판 이라고나 할까
회색 앞치마에 하얀장화를 신은 선머스마 같은 산아가씨가 뛰어 오더니 인사말 하나 뿌리고는
나를 스치고 오던걸음으로 뛰어 간다
‘무슨일인가?’ ‘알게뭐람?’ 나는 아까부터 들리는 물소리를 따라 간다
햇빛도 안 들어오는 울창한 숲속에 자그마한 개울이 흐르고 있다
산순이 물을 만난 것이다
졸졸졸 흐르는 물에 뛰어들지는 못하지만 코펠로 한코펠 씩 물을 퍼서 신나게 몸에 끼얹는다.
‘아이 ~~차다’
빛이 없는 숲속에서 찬물에 목욕하고 감기 걸릴지 모르니 오리털을 꺼내 입고 따스한 커피한잔 마신다.
개운한 몸으로 길을 따라 더 가니 사스레 나무들이 반쯤은 바닥에 누워 자라는 멋진 숲이 나오고
그 사이로 진짜 알프스에나 있을 법한 자그마한 집이 보인다.
저기가 오늘 목적지인 구마노다이라고야 인가 보다.
산장이 가까워졌는지 작은 텐트사이드들이 풀밭 사이사이에 있고 조그마한 실개천 하나 그사이를 흐르고
가느다란 나무사다리가 질퍽한 진흑탕 속에서 길표시를 하고 있다
실개천 옆 텐트사이드에 배낭을 내린다
산장은 길을 따라 더 가야할 것 같아 그냥 이곳에 텐트를 치고 신고하러 가기로 한다
오늘 산행 거리는 지도상으로 4시간 20분 거리인데 나는 아침6시에 산행을 시작해서 2시에 마쳤으니 8시간 산행을 하였네
그러니까 내스타일의 산행은 지도상의 2배 시간이 걸리네, 아마도 자리에 퍼질러 앉은 시간이 반이겠지만 ㅋ
실개천이 졸졸 흐르는 옆에 단단하게 텐트를 쳐 놓고 산장으로 향한다.
노토리다케가 정면에 웅장하게 보이는 숲속에,
이층집으로 얌전하게 자리 잡은 산장은 산장이라기보다 산속의 집 같다
산장 앞에는 나무로 만든 테라가가 숲과 어울리게 지어져있다.
산장으로 들어가니 하얀 수염의 아저씨가 마음씨 좋은 미소로 맞아들인다.
우선 점심 겸 저녁으로 카레라이스를 주문하니 등산객이 없는 비시즌의 산장에는 밥이 준비 안 되어 있는지
처음에는 안된다하더니 한시간기다리란다
판매대를 보니 빵도 있고 우유도 있고 눈에 확 들어오는 맥주도 있다
‘가만있어보자 지금까지 거진 하루에 3000엔씩 썼으니 20일 잡아도 60,000엔이면 경비가 남아 돌을테니까
사치를 좀 해볼까나‘
카레라이스 기다리는 시간에 빵과 맥주를 사들고 테라스로 간다.
맥주 한 켄은 그야말로 한 모금 밖에 안 되는지 금방 동이 났지만 몸은 알코올이 들어갔다는 아무런 기별도 없다
어느덧 시간이 흘렀나 카레라이스를 쟁반에 들고 나오는 사람이
아까 오는 길에 본 산아가씨와 똑 같은 차림이다
아마 여기 직원인 모양이다
식사를 마치고 빈그릇을 들고 산장에 들어가니 여직원이 인사를 하며 말을 건넨다
영어를 아느냐고
일본어 보다는 많이 아니까 그렇다고 대답을 하니까
영어를 무척이나 하고 싶었는지 나에게 영어로 많은 말을 하는데
반정도만 알아 들을 수 있지만 연신 고개를 끄덕거려 준다
이제 내가 물어볼 차례! 지도에 ‘시오미산장 2015년 휴업’이라는 표시를 가리키며 맞느냐 물었더니
공사중이라 문을 닫았지만 다음산장인 삼부쿠도케고야까지 충분히 갈 수 있다고
혹시나 해서 지도를 펴 놓고 하타나기댐에서 시즈오카 가는 버스를 물었더니
노버스라고 체인지 체인지 체인지를 하거나 스톱스톱하고 히치하이킹을 해야 한다네
그리고 이번주 토요일인 19일부터 23일까지 연휴여서 등산객이 무척 많을 것이라고
그리고 중간 중간에 있는 산장들은 8월31일까지 영업을 하거나 연휴마지막날인 9월23일까지만 영업을 한다고
산장에 비치된 산장 인포메이션을 보니 역시나 산장 영업기간과 야영 가능 표시 식수 표시들이 있어
사진을 찍어 자료로 삼는다
이 산장은 숲 속에 있는 관계로 일몰이나 일출을 볼 수 없을 것 같아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기로 하고 텐트사이드로 간다.
그야말로 한가한 시간 일몰시간도 맞출 필요 없으니 텐트 문 열어놓고 빈둥빈둥 거리는데
20대쯤 보이는 젊은 총각이 큰 배낭을 메고 이리저리 살피더니
내 텐트사이드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곳에 배낭을 내려놓고 텐트를 친다.
A형 텐트로 다른 부속들은 일절 없고 천막 또한 무척 얇고 가벼운 천으로 완전 심플하다
이렇게 야영을 하며 다닐 수 있는 산이 있고, 다니는 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부러웁다.
그런데 어쩐다나 내일 코스가 제일 문제의 코스이다
거진 3,4시간마다 있는 산장이 내일은 5시간40분가야 있고 그나마 이 산장이 올해는 工事中이라 休業이란다
하는 수 없이 중간에서 야영을 해야 하는데 지도상에 물표시가 있는 곳은 이곳에서 4시간가야 있고
그나마 이 물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만약에 물을 찾을 수 없다면 여기서부터 3리터정도의 물을 지고 가야 된다
그런데다가 모레부터 비가 온다니.........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도 뾰족한 수는 안 나온다
그래도 여기서부터 3키로나 되는 물을 지고 갈 수는 없을 것 같아 공사 중인 산장까지 가기로 결정을 한다.
공사중이라도 산장자리이니 물은 있겠지
여기까지 공부하고 렌턴을 끈다
숲속의 집은 고요하고 아늑하다
9월15일
눈을 뜨니 주위는 컴컴하다 시계를 보니 4시가 다 되어 가고 있다
5시에 아침을 먹어야하는데 기가 막히게 알맞은 시간에 눈이 떠진다.
새벽 마다 치르는 일
- 침낭과 메트리스를 꽉꽉 조여 주머니에 넣어 배낭 맨 밑바닥에 잘 쑤셔 넣고
텐트 안에 가득한 살림살이를 어제 놓았던 그 순서대로 차곡차곡 쌓아 배낭에 넣으면
이삿짐이 다 싸진 빈 집처럼 텐트는 빈 텐트가 된다
그러면 인제 텐트를 나와 배낭을 꺼내놓고 텐트를 걷는다
텐트는 이슬에 젖어 축축하지만 말릴 수 없으므로 그냥 접어
주머니에 넣고 배낭 바닥에 메단다.
날이 약간 쌀쌀하여 윈드스토퍼를 챙겨 입고 배낭을 메고 산장으로 간다.
아침은 카레라이스와 비슷한 가격이므로 정식 아침식사를 주문하였는데
여기도 역시 간이식당의 도시락처럼 밥과 미소 소세지, 계란말이 야채볶음, 낫또
그래도 이런 정식은 국과 밥을 더 먹을 수 있어서 좋다
산장에 설치된 모니터에서 날씨를 보니까 내일과 모레는 비로 되어 있다
야영을 해야 될지도 모르기에 컵라면 두 개를 사서 배낭에 메달고 물1리터만 떠서 길을 나선다.
산장 유리창 안으로 마음씨 좋게 생긴 아저씨와 영어 잘하는 노처녀, 그리고 일본알프스소녀가
서서 정답게 손을 흔들어 준다.
새벽 6시이다
길은 완만한 숲길이라 시계가 없다
기다다케와 아이노다케 길과는 또 전혀 다른 산길이 이어진다.
얼른 숲을 지나 시계가 펑 트이는 곳으로 가고 싶어서 발길이 빨라진다.
한시간 정도 걸으니 길이 가파라지면 산을 오르고 있더니
드디어 시계가 펑 트인다
저기 멀리 오늘 내가 지나야할 시오미산이
긴능선 뻗고 멋지게 앉았다
이른 아침의 상쾌한 숲길을 혼자 걷고 있자니, 오늘 이산은 내가 전세를 내어 놓은듯하다
이 아침의 맑고 신선한 공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걸어가는 순간
나의 몸도 숲속의 나무들처럼 맑아지는 느낌이다
한참을 아침을 맞았는데도 아직도 10시 이렇게 길게 아침을 온몸으로 맞아본 것이 언제적인가?
아마도 스므살 노고단에서 반야봉으로 올랐던 시간과 같다
많은 것이 지리산을 생각케하는 남알프스이다
다만 3000m높이 이기에 그 크기나 시간이 조금 더 길뿐이다
한참을 아침의 한가운데를 걸어가고 있는데 여기는 또 다른 세상이 나온다
지금까지는 빛도 들기 힘든 쭉쭉 뻗어 빾빾한 상록수나무 숲이었는데,
갑자기 파란하늘이 나타나더니 너른 풀밭에 듬성듬성 오래된 사스레나무가
하나하나의 이야기를 갖고 있는 듯 멋진 모양으로 틀어지고 비틀어져 땅에 누웠고
그 뒤로 노토리다케에서 뻗은 긴 능선이 흐르고
그위로 파아란 하늘에는 춤이라도 추는 듯 하얀구름들이 너울너울 흘러가고 있다
구불어질 데로 구불어져 땅에 눕거나 앉아 하늘을 향해 꼬부라진 가지를 뻗은
마치 움직여 율동을 하던 나무들이 갑자기 정지 되어 서있는 듯한
구불어지고 꼬인 가운데에 질서와 균형이 있는,
마치 케냐나 아프리카를 연상케하는 숲이다
어떻게 저렇게 나무는 나무 데로, 풀은 풀 데로 질서를 갖고 서로 어울려서 자연스러움을 이루는지
마치 이상의 세계같다
그곳에서 노니노라니 마치 소풍을 온 듯 평화롭다
한참을 감탄을 하면서 가는데, 시야가 뻥 뚫리며 또 다른 세상이 나온다
얄팍한 잔돌들이 마치 바닷가 긴 모래사장처럼 쫙 깔린 봉우리이다
서쪽 사면은 아마도 사태가 났는지 천길 낭떠러지이고
산꼭데기 능선의 나무들은 메서운 서풍에 견디지 못하고 서서히 죽어가 고사목이 되어가고 있다
마치 몇만년전 원시 그대로의 모습인양
그 뒤로 시오미산이 양쪽 능선을 넓게 펼치고 포진하고 있다
언제 또 볼지 모르는 멋진 풍경에서 오래 머물고 싶어 점심 핑게로 주저앉는다.
마침 시간도 12시로 향하고 있고
컴라면 하나 끓여 먹는 사이 큰 배낭을 멘 젊은 남자 한사람 그리고 중년의 커플 한팀이 지나간다.
어자피 이곳에서 머무를 수 없으니 다시 길을 나선다.
파스락 파스락 잔돌들을 밟으며 십여분 왔을까
마치 신들의 정원인 듯한 숲이 나오고 그아래 풀밭에는 자그마한 길이 정원으로 안내를 하듯 누워있다
그 정원으로 들어서니 오래된 농막처럼 나무로 지어진 집이 한 채 있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보니 대문은 나무판자로 막아 못 질을 단단히 해 놓았다
오늘은 이곳에서 잘까 하고 듬섬듬성 보이는 나무판자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니
너무 오래 동안 방치되어 먼지와 풀데기와 쓰레기가 쌓여 있는 폐허가 된 살풍경이다
옆에 계곡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물도 있을 법도 해서 잠깐을 망설여 보는데 맘에 영 들어오지 않는다.
그냥 조금 더 놀고 아쉬운 눈꼬리 남기고 다시 길을 나선다. 길을 나서는데도 자꾸 눈은 뒤돌아진다.
아마도 여기 어디쯤이 지도상에 표시된 물이 있다는 곳 같아 유심히 길을 살피며 가는데
물이 있다는 안내 표지판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계곡 쪽으로 난 실 같은 길이 있는데
이길로 계곡을 간다면 30분 이상이 걸릴 것 같다
혹시나 야영을 할지 모르기에 배낭을 놓고 물을 길러 가 볼까 생각을 하다가
그 길이가 너무 길고 또 물이 있다는 확실한 표시도 없으므로 그냥 지나쳐 가기로한다.
태앙은 이제 정수리를 지나서 서쪽으로 가고 있는지
구름이 스물스물 몰려들기 시작한다.
난생 처음 보는 새로운 풍경에 신나게 놀은 탓에 몸이 좀 피곤한 듯 하다
그래도 쉴 때마다 행동식으로 육포와 잣과 건포도를 꼬박꼬박 챙겨 먹으니 허기는 지지 않는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오르막길이다
어자피 구름들이 몰려들어 볼거리도 없으니 오르는 일에만 열중하기 위해 땅만 보고 걷기로 한다.
어느새 호흡은 가라앉아 시끄러운 나는 없고 한발한발 내딪는 다리만 있다
가스 속으로 간간히 물소리가 들린다 깍아지른 능선 가까이 계곡이 흐르는 모양이다
한시간여 올라 왔을까? 삼거리 이정표와 野營禁止 라고 쓴 나무판이 바닥에 누어져 있다
야영금지?! 야영금지라 보통 야영금지라함은 야영터가 있다는 말이다
고개를 들어 살펴 보니 과연 시오미 반대편으로 가는 길에 여우처럼 기똥찬 텐트사이드가 있다
시오미 정상 밑, 능선 아래과 움푹 들어가 있는 여우같은 텐트사이드
한곳은 넓지만 바람이 좀 탈듯하고, 한곳은 좁고 바닥이 좀 울퉁불퉁하지만
마치 요새처럼 봉긋한 낮은 동산이 떡하니 버티고 있어 바람을 전혀 안 탈 듯하다.
어쩐다냐? 잠시 코스를 고민중이다.
배낭을 지고 2시간 더 가야 있는 공사중인 시오미산장에서 잘 것인가
배낭을 내려놓고 한두시간여를 헤메서 물을 찾아 이곳에서 잘 것인가?
물어보나 마나 벌써 마음은 이곳에 있다
다만 하나 내일은 비가 온다고 하였으니 언제부터 비가 올지 모르는 것이 걸리긴하지만 .....
야영금지라는 나무판자를 살짝 뒤집어 놓고
배낭을 숨기러 숲에 들어간다
지난 봄 나물하러 청의당에 갔다가 하봉에서 나물 뜯어 온 사이에 짐을 도둑맞아 고생한 적이 있어서 단단히 숨겨놓는다
물빽과 세면도구를 챙겨서 아까 물소리가 났던 곳 까지 내려간다
조금 내려가니 역시 길 양쪽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난다
왼쪽으로는 경사가 완만하지만 물소리가 좀 멀고
오른쪽으로는 사태져 급경사 이지만 물소리가 가까웁다
왼쪽 경사가 완만한 곳은 경사가 완만하지만 잡목이 우거져 들어가기 힘들 것 같고
오른쪽 사태골은 사태지역만 미끄러져 내려가면 금세 물을 만난 것 같아
오른쪽 사태골로 내려선다
급경사 사태골로 발을 내딪는데 와~~ 아래쪽을 바라보니
잘못하여 미끄러졌다가는 아예 산아래로 굴러 내려갈 것 같다.
두다리에 힘을 줘 조심조심 사태지역을 가로질러 내려서니
검게 드러난 사태지역 바위골로 좔졸좔 물줄기가 흐르고 있다
워낙 경사가 져서 고인물은 없고 아래로 떨어지기만한다
혹시 몰라서 5리터 정도를 채우고 몸을 일으키는데,
아까 산길을 오르면서 혹시 물뜨러 가는 길이 이길인가? 하였던 곳 근처에서
한 남자가 왔다갔다 한다 .
멀리서 보아도 야영터를 고르고 있는 듯
아마도 그곳이 물뜨러 가는 길이 맞았던 모양이다
물을 본 나는 신나게 뒤집어 쓰고 싶었지만 사람이 보이는 관계로
세수와 이빨만 닦고 물빽을 메고 다시 길을 찾는다
아까 왔던 길은 너무나 사태져서 혹시나 좀 더 쉬운 길이 있나 하고 다른곳으로 좀 돌았더니 에구구 더 힘들기만하다.
휴~~ 여우같은 자리에 집을 지었으니 이제 비가오든 바람이 불든 걱정이 없다
그래도 조금 바램이 있다면 ‘심하게만 불거나 오지 말아줬으면’ 하고 기죽은 소리를 내어본다
밥은 어떻게 지어 먹을까?
오늘은 많이 놀고 또 지금까지의 산행 중에 제일 긴 길을 오래 걸었기에 몸이 좀 피곤한 관계로
그냥 신라면 한 개에 잡곡밥 불린 것을 먹기로 한다
저녁을 먹고 소화를 시킬 겸 밖에 나와 보니 저 아래 텐트가 한동 보인다
그도 나처럼 산을 왠간히도 좋아하나보다
9월16일
4시기상 - 배낭꾸리기, 5시 -아침식사, 5시반경 - 텐트 걷고 산행시작 산행중 행동식
오후2,3시경 목적지 도착 - 텐트 짓고 점심 겸 저녁식사 오후4,5시 일몰구경이나 휴식
오후 7시 취침 시작
협의사항도 없었는데도 몸과 마음이 알아서 스케쥴을 짜고 서로 의견대립 없이 착착 알아서 진행해준다
‘산에서야 하나가 되는 마음들과 몸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4시에 눈이 떠졌는데
에구구 오늘은 몸이 좀 무거웁네 역시 노는 것은 피곤한 일 인가벼, 어제 신들의 정원에서 너무 신나게 놀았나벼!
오늘은 비도 온다고 하고 야영지도 마음에 들고 물도 충분하니 이곳에서 제껴 볼까나!
그러면 좀 뒹굴거리다가 커피한잔 타 먹고 일출구경이나 가보자 ㅋ
소풍보따리 들고 해가 뜨기 전에 먼져 해맞이 좋은 장소에 앉아 해를 기다려본다
그런데 이거 무슨 냄새지?
삶은계란냄새? 계란 썩는 냄새? 유황냄새네!
저 아래 계곡을 타고 올라오는 유황냄새가 코를 찌른다
塩見岳(시오미다케 3,046m) 소금이 보인다는 산, 소금밭인 바다가 보일 정도로 높은 산이라는 뜻인가?
모르겠다만 유황냄새 까지 매쾌하게 나는 걸 보니 왠지 엄청 높은곳에 있는 활화산 같은 생각도 든다
하늘엔 구름으로 덥여 있고 그 구름들 틈새로 해가 삐죽이 올라온다
비가 오긴 올려나 보다
구름이 많아 크게 볼 거리가 없어 일찌감치 텐트로 들어가 모처럼 아침을 해 먹는다
밥은 어제 잡곡밥 누룽지에 물을 적당히 부어놓았더니 밥처럼 부풀어져 있으니 이걸 데펴 먹고
반찬은 미역국을 끓여볼까?
불려놓은 미역국거리에-미역과, 북어, 육포-
참기름과 소금을 넣고 달달달 볶다 물을 부어 진하게 끓였더니 냄새가 죽인다
저녁까지 먹을 량으로 한코펠 가득 만들어 놓고 밥을 데펴서 처음으로 내가 지은 밥을 먹어본다.
맛나당!
밥먹고 커피마시고 뒹굴뒹굴 누웠는데도 빗소리는 나지 않는다
밖을 보니 구름은 하늘만 뒤덮고 있을 뿐 빗방울 떨어뜨릴 생각은 하지도 않는듯하다
‘비도 안 오는데 짐 싸서 가야하는 거 아니야?’
그런데 몸이 처음으로 반대한다, 미역국 끓여 놓은 것도 비닐봉지에 싸야하고,
지금 가다가 비라도 맞으면 낭패이고, 몸도 피곤하고 무거우니 그냥 쉬자 한다.
회의 는 끝났고 ‘그럼 비 오기 전에 빈 몸으로 한 바퀴 돌고 올까?’
지도를 보니 여기 시오미다케 삼거리에서 동남쪽으로 길게 뻗은 능선이 제법 크고 길다
‘이곳은 이번산행에서 못 가보는 길이니 시간이 있을 때 한번 걸어보자!’
좀 쉬었다가 다시 소풍보따리를 싸서 시오미다케 정상과 반대편에 있는 능선을 오른다.
뾰족하던 가이코마가다케는 이제 가물가물해지고, 아이노다케와 노토리다케가 눈앞에 떡허니 웅장하게 서있다
길은 산능선을 따라 완만하게 나져있다 그야말로 소풍 길로 제격이다
놀다보니 어느새 구름 사이로 해가 정수리에 올라와 있다
이제 오던 길로 다시 돌아서 내 쉼터를 찾아 가야겠다
돌아 갈 생각도 안하고 많이도 왔나보다 가는 길이 힘겨웁다.
나만의 보금자리에 와서 그야말로 넉다운이 되어 누웠다. 어느새 잠이 들었나 빗소리가 들린다
그 빗소리 들으며 또다시 오수로 빠져든다.
추적추적 가는비가 내린다 이 추세라면 아마도 내일도 비가 올 것 같다
입안이 깔깔하니 매콤한게 먹고 싶어 신라면 하나 끓여 김치대신 고추장에 마늘을 찍어 먹고 다시 본격적인 잠에 빠져든다
9월17일
어제 일찍 잔 탓인가 오늘은 3시에 눈이 떠진다.
아직도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다
물도 충분하겠다 오늘 하루도 여기서 쉬기로 하고 다시 눈을 감는다
날이 새니 비의 강도가 좀 더 세어지고 바람도 잦아진다
고어텍스 텐트라지만 결로도 있고 이음새부분으로 빗물도 스며들고
누워서 이리저리 닦다 보니 누워서 할 일이 아닌 것 같아 일어나 앉아 본격적인 수색작업을 시작하니
저기 발치아래에 빗물이 흥건히 고여 있다.
우선 부풀데로 부풀어 있는 침낭부터 주머니에 집어 넣고, 오리털파카와 바지를 꺼내 입고는 작업에 나선다.
고여 있는 물은 수건으로 닦아 밖에 짜버리고를 여러번 해서 물을 다 퍼내고
후라이가 안 닿아서 비가 세는 곳은 다시 후라이를 덥어주고
텐트 벽도, 바닥도 수건으로 닦아 물기를 없애주고
급한 데로 텐트 안에 물은 안 보인다.
일어났으니 아침도해결해야지
어제 불려놓은 밥과 어제아침에 해놓은 미역국을 데펴서 고추장에 마늘과 북어를 찍어서 먹는다
미역국이 또 남았네 저녁이나 내일 아침에 먹으면 되겠지,
미역국 코펠이 쏟아지지 않게 뚜껑을 꼭 닫아서 한쪽 귀퉁이에 조심히 놓는다.
일인용 좁은 텐트 안
길게 에어메트리스가 깔려 있고 그 위에 오리털로 무장한 내가 침낭보따리를 다리에 끼고 누워있고
나머지 좁은 공간엔 가죽배낭에 식량과 여벌옷등 나머지 짐을 모두 비닐봉지에 싸서 집어넣고
그옆에 비닐봉지 안에 등산화, 그리고 한쪽 끝에 미역국이 들어있는 코펠과 후라이펜, 가스와 법랑컵 물빽
내 방 안 풍경이다
오늘은 이렇게 하루종일 누워있는 신세인가 보다
오리털버선이 없어서 발이 시려워 윈드스토퍼자켓으로 발을 동동 감싼다.
이쪽으로 누웠다가 저쪽으로 누웠다가 반드시 누웠다가를 여러번 반복하고
몇시간에 한번씩 고인물을 퍼내고 그사이에 잠시 쪽잠이 들고 잠이 깨고
그러다 보니 꼬르륵
산행을 할 때는 계속 행동식을 먹으며 이동을 하고 주위에 볼거리도 많아서 배가 고프지도 않고 고픈 것도 잊고 하는데
쉬는 날이면 유난히 점심을 챙긴다
산장에서 사온 하나 남은 사발면을 끓여 먹는다
사발면은 돼지육수라고 하더니 오일스프도 있는데 꼭 돼지기름 처럼 하얗게 응고되어 있다
보기는 좀 그래도 따스한 물에 타 넣으니 금새 녹아버린다
뭐 맛은 그런데로 괞찬은 편이네
점심을 때우고 또다시 오전과 똑같이 이쪽저쪽 굴려가며 하루를 보낸다
비는 하루종일 쉬지도 않고 온다
오랜만에 텐트에서 맞는 비이다
내가 가지고 다니던 오래된 동진텐트는 넓은 앞쪽으로 문이 나있고 후라이가 넓게 덥혀 있어서
비오는 날도 텐트 문을 열고 밖을 쳐다보곤 하는데
동욱이가 찬조해준 이 텐트는 좁은 경사로를 따라 문이 나있고,
그나마 새로 만들어온 후라이도 바람 때문에 텐트 폴대에 바짝 붙여두어
텐트와 후라이에 공간이 없어서 문도 못 열고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한다
내 몸과 마음들이 이리 협동이 잘 되어본 적이 또 있을까?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쥐죽은 듯 몸과 맘이 아무런 요동도 없다
요동이 있어봐야 지들만 힘들을 줄 아는 모양이다
비는 마치 하늘에서 누가 바께스로 뿌리는 듯
바람 따라 심하게 내리치다 잦아들고 또 심하게 내리치다 잦아들고를 여러번 반복하고 있다
군대의 시계마냥 어느새 시간이 흘러 밖이 컴컴해져 온다.
저녁으로는 무얼 먹을까?
후라이펜에 참기름 두르고 불린 잡곡밥에 불려놓은 육포와 마늘을 썰어 넣고 치즈 얹어 녹이고
고추장 쓱쓱 비벼서 비빔밥 해 먹자!
고추장이 매워서 땀을 뻘뻘 흘려가며 오랜만에 맛있게 먹는다.
칠흑처럼 캄캄한 밤이다
렌턴 밧데리도 아껴야 하기에 렌턴도 안 켜고 있으니
칠흑처럼 캄캄한 밤에 솨아솨아 빗소리만 살아 있는듯하다
나는 살아있는가 죽어있는가?
그런데 갑자기 밝은빛이 팍 비추다 사라진다 그리고 이내 우루루쾅
폭죽처럼 번개와 천둥이 친다
폭죽? 그래 처음에는 폭죽이라 생각하고 웃으며 있었는데
어라 번개는 갈수록 잦아지고 천둥은 갈수록 번개와 가까운 시간에 때리고 있다
이크 이거 머리 위에서 번개치고 있는거 아니야?
조용하던 내마음도 조금씩 요동이 일기 시작한다
이크 이거 번개 맞아 죽는 거 아닌지 몰라!
조금씩 요동하던 마음은 번개 맞아 죽는데도 지금당장 무슨 수를 쓸 수 있는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자
포기를 하는 가 요동하던 마음이 조금씩 줄어든다.
그렇게 내 요동도 줄어드니 번개도 슬슬 멀어져 간다 천둥소리도 번개와 같이 멀어지고
아직 죽을 운은 아닌가벼 ㅋ
9월18일
눈을 뜨니 3시반을 넘어서고 있다
어제 번개와 천둥이 비를 몰고 다른 곳으로 갔는지 빗소리는 없다
그렇다면 오늘은 또 길을 나서야 겠네
렌턴을 텐트 안에 비춰보니 저기 발치에 또 물이 고여있다.
렌턴걸이에 렌턴을 걸어 놓으니 작은 텐트 안이 훤하다
우선 급한데로 고인물을 수건으로 모두 거두어 닦아 내고
다시 침낭 속으로 들어간다
잠시동안 침낭 밖에서 일을하던 상체가 침낭으로 들어오니 따스하다
추위가 있어야지 따스함이 있는것인가? 배고픔이 있어야지 맛있는 입맛이 있는것인가?
힘겨움이 있어야지 꿀맛같은 휴식이있는 것인가?
잠시 따스함에 행복함을 느껴본다
그 따스함도 잠시 오늘은 길을 나서야 하니 일찌감치 서둘러야겠다
밖에 날씨도 살필 겸 일어나 오리털 찾아 입고 텐트 문을 연다
새벽바람이 차지만 상쾌하다
텐트에서 나와 일어서 본다
와 근 서른여 시간 만에 일어서 보는거네!
센조가다케와 가이코마가다케, 아이노다케와 노토리다케가 가슴 속으로 들어온다
서쪽하늘은 완전히 개어 있지만 동쪽하늘은 아직도 구름이 조금 남아있다
오늘 일출은 구름 때문에 보기 힘들겠네 그렇타면 아침밥을 먹고 짐을 다 싼 후에 텐트 걷어서 나서야겠다
샹쾌한 새벽공기를 가득 묻혀 텐트에 들어온다.
텐트 안은 따스하다 우선은 널려있는 침낭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아침준비를 한다.
불려놓은 잡곡밥을 데피고 미역국도 데피고 반찬은 북어와 마늘 그리고 고추장
좁은 텐트 안 렌턴 불 빛 아래 아침상을 차려놓고 미역국 한 숟가락 입으로 들어가는데
울컥! 뭔가 커다란 마치 히로시마 원자폭탄 같은 것이 가슴속에 ‘욱’ 하고 솟아난다.
그 속에 얼굴하나! 평온한 얼굴하나 잠시 스친다!
너무나 오랜만에 보는 평온한 오래 전의 나의 얼굴이다
산에 들어와 잊어버렸던
꿈을 이루고, 그 꿈 속에서 현실과 더 큰 혼돈 속에 살았던
더 이상 꿀 꿈이 없어서 , 꿈이 없었던 그래서 혼돈의 시기였던 지난 몇 년이 지나간다.
미역국 한 숟가락 들어간 입에서 갑자기 울음이 터진다, 울음은 이내 통곡으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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