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오랫만에 일요일을 느끼는 기분입니다
지리산으로 들어 와서 적응이 안 되는 것 중에 하나가
일요일이 없다는것!
사회 생활에서의 일요일은 참으로 소중한 나만의 시간이고 휴식 시간이었는데
더군다나 산에 다니는 취미가 있는 나는 일요일만 되면 산에 가서 숨을 쉬고 왔었는데
이건 뭐 , 산에 올라 가지도 못하고,
따로 정해진 일요일도 없고, 굳이 있다면 비오는 날이 쉬는 날 일뿐
대장님은 무슨일이라도 만들어 하루를 꼼지락 거리시니
쌔까만 후배가 가만히 쉴 수 도, 산에 가고 싶다고 할 수 도 없고
정립되어진 것도 없고, 안정된 것도 없고,
모든것을 새로 만들어야 하고, 뭔가를 하여야하고
'일요일이라는 것이 이래서 필요한 건가?' 속으로 만 생각 하였었는데
그 일요일을 버리는 데 한 삼년 정도 걸린듯 합니다
사람의 습관이란 관습이란 개념이란 그리 무서운 것 인가 봅니다
한번 몸에 들면 그것을 때어 내기란 거머리 때어 내기 보다 훨씬 어려운
거머리는 눈에 보이기나 하지--
이것은 완전히 내가 되어 있기에
그것을 따로 때어 보는 일도 어려울진데
그것을 잘라 내는 일이란
나의 일부분을 잘라 내는 일과 같이 어려운일이리라 생각됩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산이 너무나 좋아 그동안 쌓아 왔던 모든것을 버리고 산에 들어와 사는것,
경험해보진 않았지만
태어나 자란 나의 식구들과 헤어져 환경이 전혀 틀린 사람과 같이 산다는 것
둘은 역시 같은것 아닐까
그동안의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를 만들어 가는 과정
꿈과 사랑이라는 것이 만들어준 새로운 세상, 새로운 나
그러나 적응하기엔, 새로운 나를 만들기엔
엄청난 힘과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
일요일 생각에 사설이 길었네요....
오늘은 쉬는 날,
짐싸는 고역도 없는 날 이라 오랫만에(?) 느긋합니다
낮잠을 자면 된다는 생각에
일찌감치 일어나 메트리스와 보온병, 카메라를 들고 나의 놀이터로 향합니다
바위가 바람을 막아주고, 해뜨는 것이 바로 보이는 따스한 나의 자리
역시 눈에 파뭏혀 있습니다
눈을 밀어 내고 메트리스르 깔고 앉아 보온병에 들은 커피 한잔과 함께 새벽을 마십니다
아!!!
이 막힘없는 탁 트임 시원함.
발아래서 꿈틀거리며 길게 누워있는 능선들
엄청난시간을 꿋꿋이 묵묵히 서 있었을 산들
한세상을 돌고 또다시 땅위를 흐르는 강물들
맨몸이 되어 또다시 한겨울을 감내하고 있는 나무들
그리고
새로운 세상이 태동을 하는듯 더욱 불게 불게 번져가는 하늘
힘들여 산에 오른 김에 단 한시간만 할애하여 저 자연을 바라 볼 수 있다면 아니 십분만 이라도.....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될 테이고
종교의식 보다 더 깊은 충만된 환희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저 가슴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는 그 무엇도 느낄수 있을텐데
.........
그 잠깐 동안의 바라봄으로
나의 시선을, 개념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텐데
밤새 반짝이며 도시의 밤을 지키던 밤의 등불들이 히미해지며 사그라져가고
저 구름 너머엔 태양이 오늘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엊 저녁 사람목소리가 들리더니 천왕봉이 보이는 곳에서 야영을 했나 봅니다
해뜰무렵이 되니 뒤가 시끌 시끌 합니다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고 다른 곳으로 옮깁니다
닷새만에 처음 사람을 만나지만 반갑거나 기쁘지 않습니다
만약에 아는 사람이라면 이야기는 틀려지겠지만
그것은 무슨 차이일까?
'지금까지 너 좋아하는일만 하고 살았으니 이제는 너 싫은일도 좀 하고 살아라!'
산행하기전 들은 말이 내내 가슴을 찌르고 있습니다
산행하는 스타일도 삶의 스타일도 변화가 필요할 때 입니다
구름은 이내 모든것을 덮어버리고 써리봉 봉우리만 가지고 놉니다
검고 하얀 무채색의 산
겨울산은 분명 '눈으로 보는 산'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보는 산' 입니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산에 오르면 다음날은 여지없이 아주 쌔까만 폭탄을 눕니다
모든 스트레스와 삶의 찌꺼기들 까지 다 나와버리는 것 같아 무지 기분이 좋았는데
몇 년 전서 부터는 산에서 몇 일을 보내면 빠알간 선혈까지
놀라서 큰 병원에 가서 진찰도 받고 내시경도 받아 보았었는데
다행히 질병은 아니고 항문주위의 실핏줄이 터진 것이라고 따스한물에 좌욕을 좀 하면 괞찬다 합니다
쌔까만 그리고 쌔빨간 것 까지 다 보고도 내려갈 생각은 눈꼽 만큼도 없습니다
송대마을 화전민의 산증인인 박영남아주머니-연세는팔십이되가지만 할머니라는소리가 안나옵니다-는
'도데체 임양이 산에가서 뭔짓을 하는지 내가 힘만 있으면 몰래 뒤쫒아 가서 멀지감치 서서 보고 올텐데....'
하셨는데 도데체 무엇이 나를 산으로 이끄는가?
기도하려, 도를닦으러 다니는 것도 아닌 그냥 산속의 생활을 좋아하는 나는 무슨 팔자일까?
아무리 생각을 해도 답이 안나옵니다
'이번에는 답을 찾으려나?' 하고 올라왔지만 가슴만 답답해질 뿐
나의 모든 소프트웨어는 정지된 지 이미 몇일째고
하루종일 빈둥빈둥 내세상 중봉에서 아무생각 없이 먹고자고 합니다
하지만 산에서 만이 도망가 버리는 마음
밑에 내려가면 다시 나를 잡고 뒤흔들 나의 주인 내마음
아!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산에서야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작용을 하지 못하는 것이고
밑에 내려가서도 내가 나를 컨트롤 할 수 만 있다면 진정 자유인으로 살을 수 있을텐데
...........
심심하면 나뭇가지 사이에 햇님도 걸어보고
천왕봉 구경갔다가, 반야봉 구경갔다가,
진주 도시구경갔다가, 삼천포 와룡산에도 가보았다가
날 좋으면 멀리 남해바다에 섬이 몇개나 떠있는지 새어보기도 할텐데
ㅋㅋ
근처에 구름 공장이 문을 열었는지 자꾸 구름들을 제조해서 보내옵니다
겨울 산행 행사중의 하나는 모닥불 놀이 입니다
오래전 선배님들과 같이 산행을 하였을 때
우리는 비가오나 눈이오나 모닥불을 피워 놓고 놀곤 했었는데
이제 그 분들도 산에 안다니시고
나 혼자만이 남아 한겨울 눈위에서나 모닥불을 피우고 놉니다
모닥불은 정말 마술과도 같은 힘이 있습니다
사람의 혼을 가지고 가 현실이 아닌 과거로 데리고 가는 듯하고
그 아프고 힘겨운 과거는 저 불길속에서 활활타서 모두 날아가 버릴 것 같고
이제 새로운 미래가 생겨 날 것 같고 새로 시작 할 수 있을 것 같고
......
미움은 사라지고 사랑만이 남게하는 모닥불 의 힘
이제 그 모닥불을 피울 수 있는 곳은 거의 사라져 가고
우리나이 또래의 사람들의 기억에나 남아있을 모닥불
겨울밤 하얀 눈위의 혼자만의 모닥불 놀이는 겨울산행 최고의 놀이 입니다
가스를 아낄겸 코펠을 불 옆에 놓고 눈도 녹이고
그리고 숯불에 커피한잔 구워마시는 그 맛!
햇님도 구름속에서 모닥불 놀이를 하시는지 구름속이 벌겋습니다
눈물콧물 흘리며 모닥불 노래도 부르고 .....
보름달 밤이면 한 없이 놀을텐데
구름이 스물스물 몰려와 그나마 반 밖에 안 비추어 주던 달빛 마져 앗아가고
내일은 또 머나먼 길을 떠나야 하니
눈을 퍼서 모닥불을 확실히 끄고는 일찌감치 정리를 합니다
새벽녘부터 사그락 사그락 가는 눈이 나리는 것 같더니
조용히 조용히 빗방울소리가 들립니다
문을 살짝 열어 밖을 염탐하니 회색운무 속에 가느다란 비가 나립니다
뭐 약속을 한것도 아니고 일정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왠지 모르지만 비가와도 오늘은 중봉을 떠날까 합니다
월요일이라 사람도 없을 터이고 힘들면 세석산장서 자면 되니까요
밖에도 안나가고 커피마시고 밥데워먹고 짐꾸리기의 고역을 끝내고 신발을 신고 서야
텐트밖을 나섭니다
부슬부슬 가는비가 나리지만 나의 맘을 바꾸지는 못하네요
젖은 텐트를 주머니에 넣고 배낭 밖에 메달고서는 배낭카바를 씌웁니다
이틀동안 아주 잘 머문 곳에 '잘 있었다' 인사를 하고는 길을 나섭니다
이제 길은 내가 지나왔던 길과 전혀 틀린 길 입니다
등산객들이 밟아놓은 맨질맨질한 눈길은 미끄러워 도저히 오름질을 할 수 없습니다
아이젠을 꺼낼까 생각도 하였지만 배낭 내려 놓기도 귀찮아서
'저기 조금만 오르면 되는데 뭐' 하며 오르는데 자꾸 미끄러 집니다
하는 수 없이 발 앞꿈치로 팍팍 차가며 열걸음 정도 오르다 쉬고
또 열걸음 정도 오르다 쉬고를 몇번 하니
허벅지가 갈라지는 듯 아프고 뻑뻑합니다
'천왕봉 오르는게 쉬운 일이 아니지!'
'비바람'
'겨울 비바람'
'천왕봉 봉우리의 겨울 비바람'
겨울산은 겸손을 가르키는지 고개한번 들지 못하게 합니다
비바람은 뼈속까지 스며드는 듯하고
핏줄까지 얼려 버리는 듯 합니다
과히 천왕봉의 비바람입니다
몇해전 장만한 윈드스토퍼 마스크가 아니었다면 볼은 완전히 얼어 있을 텐데
참 좋은시절에 살고 있습니다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엔 이겨울 비바람이 부는 가운데도 오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엇이 저들을 이 비바람 부는데 천왕봉을 오르게 하는가?'
바람이, 반질반질한 얼음길이 내 의지로 걷지 못하게 방해를 하지만
아직은 나를 데리고 갈 때가 아닙니다
'장터목 이 왜이리 먼 거야'
재석봉을 지나서도 한참을 더 가서 장터목에 도착한 듯한 느낌입니다
이제는 사람들 사는 곳에 왔습니다
매콤한 라면국물이 먹고싶어서 라면을 사기 위해 산장 안으로 들어가는데
느낌이 이상합니다
더더덜 이빨이 떨리기 시작하더니
이마부터 벌건 기운이...
작년까지만 해도 윈드스토퍼에 얇은 반팔티셔츠만 입고 겨울산행을 했었기에
이번에는 긴 일정 이므로 겉옷은 단벌로 지내도 속 내복은 갈아입을까 하고
얇은 긴팔티셔츠 하나더 내복으로 장만하였고
바지역시 겨울바지에 얇은 속바지두개를 내복으로 장만하여 왔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이번산행에는 추위를 너무 많이 타서
위아래로 세벌씩-내복두개에 겉옷하나- 이나 입고 다니다가
비가오는 바람에 오우버트라우저를 입어야하기에
겉바지대신 오우버트라우저하의
그리고 상의는 혹시나 땀이 흘리면 갈아입을까 하고
내복하나를 벗고 대신 오우버트라우저 상의를 더 입었었는데
한해한해가 틀리는 건가?, 눈밭을 헤메느라 너무 무리를 하였었나?,
한기가 언제 세어들어 왔는지 으슬으슬 춥고 더더덜 떨리는게
잠시도 서 있기가 힘이듭니다
도저히 안되겠기에 혹시나 아는 사람이 산장에 있나 하고 안을 둘러봐도
아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어서 전화로 도움을 청합니다
'혹시 산장에 아는 사람이 있나요? 제가 몸이 좀 안좋아서 쉬었으면 좋겠어서요!'
하고 구원요청을 해보았는데
아는 사람이 있긴 한데 휴무로 집으로 내려갔을것이라고.....
이리 이리 이야기 해보라 하지만 이야기가 너무나 복잡합니다
열은 계속 오르고 이빨은 더욱 심하게 떨려오고
하는 수 없이 매점에 대고 사정이야기를 해봅니다
'제가 좀 아퍼서 그런데요 따스한 곳에서 좀 쉴 수 있을 까요"
'옆에 천왕봉실이 오픈되어 있으니 거기 가서 쉬세요'
다른 산장들은 입실시간이라는게 있어서 그시간이 되기 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이곳 장터목은 천왕봉실이 오픈되어 있다니 처음 알은 사실입니다
워낙 장터같은 곳이라 쳐다만 보고 지나다녔었는데 이런 친절도 있었구나
떨리는 손으로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니 제법 훈훈 합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배낭카바는 입구에 걸어놓고
한적한 2층으로 올라가 우선은 침낭을 꺼내서 들어가 눕습니다
조금 있으니 공단직원이 들어와서 히터를 켜는 소리가 들립니다
내가 아프다고하니 틀어 준 것인지 원래 틀어주는 것인지는 몰라도 기분 좋으라고 전자라 생각합니다
조금 누워있자니 열나는 가운데서도 오후되면 몰려들 사람들 생각이납니다
미안하긴 하지만 우선 젖은 텐트와 옷가지들을 줄에 걸어 말립니다
더더덜 떨리는 것은 조금덜해졌지만 열은 여전합니다
물이 떨어지는 바닥에는 텐트용 걸레를 깔아놓고 닦아가며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아가며 누워 따스한 커피한잔에 타이레놀 한알 먹어봅니다
요기도 못 하고 얼마큼을 잤는지...
시끌 시끌한 소리에 잠을 깹니다
열은 여전하고 머리도 깨질듯 아픕니다
다행히 떨리는 것은 들하고 추운것도 들하고
일어나서 널어 놓은것들을 만져보니 신기하게도 뽀송뽀송하게 말라 있습니다
바닥에 물 떨어진곳을 걸레로 닦아 놓고는 마른빨레 개듯 착착 개어서
침낭 옆에 늘어 놓으니 보따리들이 재법 많습니다
사람들은 계속 몰려 들어오고....
드디어 자리가 배정이 되는지 한사람두사람 몇번몇번하고 자기자리를 찾기 시작합니다
내가 누워 자고 있는 이층은 여자침상이었으면 좋겠다 하고 있었는데 기대는 허물어졌나 봅니다
남자들이 한사람두사람 올라 와서 몇번몇번하고 자기 자리를 찾아 짐을 내리고 있습니다
하는수 없이 일어나 짐을 배낭에 꾸리기 시작하는데
공단직원이 올라와 이곳은 남자 침상이니 맞은편 2층으로 옮기라 합니다
맞은편 2층으로 3번에 걸쳐 짐을 나르고 자리를 배정받아 침낭을 깔아 놓습니다
겨울만 되면 산희샘 이라는 예뿐 이름의 장터목산장 샘물은 얼어 버리고
이백미터도 더 되는 저 아래로 샘은 이사를 갑니다
혼자서의 야영 때는 샘터가는 것이 이백미터가 된다해도 있기만 하면 좋은데
장터목에서는 내려가는일이 왜그리 귀찮았는지
사람은 편해지면 더 편하기를 바라는 것인가?
이왕지사 장터목 호텔에 머물고 있으니 아프다는 핑게로 호사를 하여봅니다
물도 사먹고 반찬거리도 사고 과자도 사고
오랫만에 라면국물에 찬밥 남은것을 데펴 먹습니다
타이레놀도 한알 더 먹어주고
장터목 산장!
목적이 있다는 것이 이런것인지
모두들 내일아침 일찍 천왕봉을 오를 사람들인지 소등시간이 되자마자 들어와 조용히 잠을 잡니다
두세번 세석산장서 잠을 잔 적이 있는데 놀러온 사람들 마냥 웃고 떠들고 늦은 시간까지 시끌시끌하던데
천왕봉이 무엇인지 이곳 장터목산장 서 숙박하는 사람들은 모두들 일찍 잠을 잡니다
코고는 소리도 밖의 바람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습니다
장터목을 넘는 밤바람소리를 들으면서 모처럼 산장에서 편하게 잠을 잠니다
새벽녁 알람을 동시에 한 것도 아닐텐데도
모두들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묵묵히 짐을 싸고 이마에 렌턴을 켜고 나갑니다
밖은 아직 어두컴컴한데 산장에 남아있는 사람은 두세사람
왠 남성 등산객이 모두 나갔으니 불 좀 켜 달라 합니다
따스한 호텔서 호사를 한 몸은 '아! 살았다!' 합니다
타이래놀 두알에 열도 사라지고 몸도 거뜬해 진 것 같습니다
오늘은 어디까지 갈까?
연화봉에서 스톱해 버릴까?
촛대봉까지 갈까?
오늘로서 집 나선지 일주일이 되었네요
배낭은 그만큼 가벼워졌고
장터목 호텔서 호화스러운 생활을 한덕에 몸살도 거진 다 나은것 같고
'걸어 내려가는 냐, 못 걸어 내려가느냐 둘 중에 하나였을뻔 했는걸!'
장터목을 나설때는 가쁜해진 마음에 가쁜해진 몸이었건만
조금 오르니 숨이차 오르고, 힘이 빠진 다리는 자꾸 미끄러집니다
어제 비가 온 후에 날이 추워져 길이 중간중간 얼어 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연하봉 바람없는 곳을 택해 배낭을 내려놓고는 아이젠을 꺼냅니다
'오호 이번산행엔 신기록이 두개나 되는걸
장터목호텔에 머문일과 아이젠을 차고 걷는일'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나의 산행 자랑 세가지
셋길 찾아 다니기, 야간에 헤드렌턴 안키기, 겨울길에 아이젠 안차기
이제 체력과 장비가 좋아져 셋길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시간이 많아 굳이 야간산행 할 일이 없으니 렌턴 켤 일도 없고
그리고 오늘 아이젠을 꺼내기 시작하였으니
자랑거리도 다 없어졌구나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길 중에 한 곳
세석에서 천왕봉가는길
그 멋들어진 길은 빨리 갈 수 없습니다
중간중간 멋진 풍경의 바위벼랑 커피숍을 그냥 지나쳐 갈 수 없기 때문이지요
역시 가다가 바위벼랑 커피숍서 커피한잔 마시고 있는데
엉? 구름사이로 왠 섬이 나타납니다
저 구름 바다 속에 연화봉섬과 일출봉섬과 천왕봉섬 이 있을텐데...
'오호라 좀 기다려 볼까나 섬들이 언젠간 나타나겠지'
한시간여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의 정성이 갸륵했는지 불쌍히 여기셨는지
구름이 옅어지면서 파아란하늘이 조금씩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입으로 후 불어 모두 남해바다로 보내 버렸으면 좋겠는데
입심이 조금 모자랐는지 이내 구름휘장이 다시 쳐집니다
'이걸로 만족해야지' '잘 보았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고는
이상한나라의 엘리스가 되어 눈속의 나라 세석으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갑니다
나의 평전 나의 큰집 대문 촛대봉 고개!
항상 이곳에 서면 감개가 무량한데 오늘은 몸이 으슬으슬 감개가 무량하지 못하네요
오면서도 내내 어디서잘까? 생각했었는데
대문에 당도해도 시원찮은 몸은 하는수 없이 하루 더 호텔서 머물자고 발을 내리막길로 이끕니다
산장에 짐을 풀어 놓고 혹시나 반야봉이라도 볼 수 있을까하여
해질녘 열나는 몸으로 촛대봉을 오르지만
햇님도 힘이 드시는지 구름의 벽을 뚫지 못하고
잠자리로 들어 가셨나 봅니다
오늘은 8천원짜리 볶음밥을 먹을까 합니다
식재료는 산장에서 파는 사천원짜리 스팸과 참치포 하나씩
스팸은 얇게 채썰어 놓고
참치포는 가위로 스팸 크기 만큼 잘라 놓습니다
버너에 불을 당기고 후라이펜에 스팸을 넣고 지글지글, 구우면서 나오는 기름으로 바삭하게 굽습니다
스팸이 다 구워지면 후라이펜을 기울여 스팸기름을 한곳에 모이게한 후 그기름에 잘라놓은 참치포를 굽습니다
참치포가 다 구워지면 여기에 찬밥을 넣고 볶습니다
여기에 소금으로 간을 하고 깨소금을 뿌려 먹습니다
ㅎㅎ
8천원짜리 볶음밥 너무나 훌륭한데
혼자 소꼽장난을 하고 있는데 아까부터 옆에서 있던 아저씨가 물어봅니다
'그거 혼자 다 먹을거요?'
'내 내일아침것 까지예요'
어제 살짝 살짝 모습을 보여 주시던 햇님은
오늘은 콧배기도 안 보여주실 작정 같습니다
편하게 잤으니 출근을 해볼까?
출근준비-메트리스 보온병 카메라다리 카메라-를 하여 눈이 나리는 촛대봉을 오릅니다
하얀 눈의 세상에서 나는 열한살의 이상한나라의 엘리스가 됩니다
눈!
너무나 신비하고 신기로운 것이어서
그 속에 있으면 가슴이 환해지면서 이상스레 웃음이나고
현실세계가 아닌 초현실의 세계에 있는 듯한 느낌이 납니다
'눈이나리네'를 연신 부르며 엘리스는 눈의 세계 깊이 깊이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촛대봉에 출근을 하였는데
뿌옇게 흐린 공장엔
'햇님사장님도 천왕봉아버님도 반야봉어머님도 안나오시고'
'연장 꺼낼 일거리도 하나 없네' 하고 투덜거리고 있는데
지나가는 구름들이 '오늘은 휴일이야' 하고 이야기 하네요
'아퍼도 일을하면 펄펄 날을텐데 사장님은 산순이 생각이 지극하십니다요....'
등산객이 모두 떠난 고즈녁한 너무나 고즈녁한 산장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것도 괞찬네요
이것도 겨울이라 가능한 일 일것이고...
열이 다 가시지 않은 몸이라 늦은 아침을 챙겨 먹고는 산장 중앙휴식실에서 한숨자고
일어나 영신봉 구경갔다가 눈꽃들하고 놀고 또 들어와 낮잠을 자고
하루왠종일 세석호텔서 놀고 먹는 백수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백수가 되어 또 하루가 가고
나만의 일정에 의하면 오늘은 벽소령쪽으로 떠나야하기에
새벽같이 일어나 일찍 아침밥 먹고 짐을 싸서
영신봉에 올라 해돋이를 보기로 하였었는데
또다시 촛대봉이 부릅니다
'촛대봉 갔다와서 가지뭐! 너무 늦으면 선비샘서 자면 되잖아?'
마음에 있는 일정표를 고치고는
보온병 가득 커피를 타며 또 출근준비를 하여 촛대봉으로 오릅니다
다행히 어제 하루종일 머물렀던 구름들은 밤새 날아가고 쾌청한 날씨 입니다
그런데
바람!
아 기운센 겨울바람이 장난이 아닙니다
저 바람들이 구름들을 다 쫒아 내었겠지만은
할일을 했으면 그만 다른데로 가지 아직도 촛대봉을 휩쓸며 이리 춥게 만드는지
촛대봉 정상부근은 잠시도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좀 이른시간이라 바람 안 부는 곳을 찾아 앉아서 커피 한잔 마시며
'사장님은 어디로 행차하시려나?' 하며 햇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지만
바람이 너무 불어 맨몸으로 서 있기도 힘이든데
기념사진 한장 찍어 드릴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촛대봉 바위도 햇님 맞으려 밤새 기다리다가 빨갛게 얼었구나!
캄캄 할 땐 몰랐는데 훤해지기 시작하니 언 몸이 드러납니다
오늘이 지나면 아니 지금이 지나면 사라져 버릴 이 아름다운 세상을 가두어 가지고 오기위해
마구마구 성이나서 인정사정없이 불어대는 바람 사이사이에서
섯다 숨었다 섯다 숨엇다를 반복하며
가슴에 들어있는 카메라를 꺼냈다 집어넣었다 꺼냈다 집어넣었다를 반복합니다
열 손가락들 역시 틈만 나면 따스한 몸으로 삐집고 들어오고
겨울엔 바위들도 인내의 꽃을 피우고
아침 햇빛에 더욱 빛이 나는 인내의 꽃들!
영신대 창불대 를 지척에 두고 청학동을 찾아가는 긴 남부능선을 길러낸
'신령스런 산신이 계신 곳'이라는 뜻을 가진 영신봉!
예로부터 지리산에서 기운이 가장 왕성한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래서 그런지 마천고을에서 보면은 부처님의 누워계신 얼굴상이랍니다
촛대봉에서 성난바람을 잔뜩 맞았으나
파란하늘의 회유에 싱글거리며 내려오니
역시 어제 머물었던 등산객들은 모두 떠나고
내 배낭만 덩그라니 산장을 지키고 있네요
늦은 아침을 먹고 가스하나 라면하나 사들고 벽소령으로 향합니다
역시 몸은 아직 다 낫지 않았는지 칠선연봉의 멋진모습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마음이 몸을 컨트롤 한다고?
그것도 몸에 이상이 없을 때 이야기고
몸이 성해야 멋이고 나발이고 있는거야'
불가능이 없는 위대한 젊음의 힘이 서서히 사라져 가고
이젠 순수한 나의 힘(?)으로 살아야 가야 할 시간들만 남았는데
남은 세월을 어찌 살아야 할까?'
순수한 나의 힘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
마음은 무거웠어도 길은 편해져서 어느새 선비샘에 닿았습니다
날 짧은 겨울 산행이라 하루에 아침 저녁 두끼만 밥을 먹고 점심은 행동식으로 하였었는데
벽소령에서 물 길러 가기 싫으니 여기서 요기를 하기로 합니다
산장에서 산 라면으로
집에서 눈에 보이기에 배낭에 끼워 넣었던 짜파게티스프를 넣고
맛있는 짜파게티를 해습니다
찬밥까지 두숟가락 넣어 먹었으니 이제 벽소령까지는 부드럽게 갈 겁니다
역시 연료의 힘 덕인지 무리없이 이른시간에 도착한 벽소령
이곳 평탄한 길을 걸으면 왠지 '평화로운 새벽의 길' 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보들보들한 솜털에 빨갛고 노란 고깔 터지는 버들강아지꽃몽우리 이쁘게 터트리는 봄날 새벽의 길
처음 걸었을 때도 왠지 전에 와 보았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포근한 길
저기 이길의 끝난지점에 벽소령산장이 있습니다
혼자서 벽소명월을 경험했던곳
저곳에 산장이 생긴다는 말에 너무나 분노하고
제발 짓지 못하게 해달라고 빌은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저곳이 있어 이렇게 다행이란 생각을하다니
하여간 줄줄이 산장이 즐비한 곳에서 탈이 났으니 부드럽게 예까지 왔네요
야영하다 몸살이 났다면 있던 자리서
배낭 뒤져가며 있는재료 없는 재료로 이것 저것 만들어 가며 조리하며 몇일을 지냈을 테고
몸살이 안 났으면 지금쯤 어디쯤 가고 있을까?
이생각 저생각에 벌써 벽소령산장에 닿았습니다
산장의 마음씨 좋은 찬수아저씨의 웃음에 집에 온 듯 긴장이 다 풀립니다
이 한겨울 여자 종주꾼의 숫자는 점점 줄어서
장터목에선 대여섯이였던 여성은 세석에선 세사람 두사람 그리고 이곳엔 나 혼자네요
덕분에 홀로 전세를 내어 오랫만에 호젓합니다
바닥에 등을 대니 물뜨러 나가기도 싫고
선비샘서 점심 먹은것이 아직도 위 속에 있어 저녁도 안 먹고 잠을 잡니다
열세시간을
깨지도 않고 잘도 잤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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